베일에 가려진 마리 앙투와네트와 페르젠과의 만남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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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가려진 마리 앙투와네트와 페르젠과의 만남 2편

by today paris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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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사랑하는 그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는 따위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야''

 

스웨덴 백작인 액셀 폰 페르젠은 그 당시 북유럽 귀족들이 견식을 넓히기 위해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나라로 도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기에 프랑스로 오게 된다. 처음 그가 베르싸이 궁전으로 왔을 때가 만 19세의 나이였다고 한다.

 

1774년 1월 30일 페르젠 백작과 마리 앙투와네트는 가면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시작된다.

 

이미지 출저: facebook

그리고 1778년 8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를 왕비인 마리 앙투와네트가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벌써 말들이 많았으며, 수려한 외모의 페르젠은 화제의 대상이 된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왕비였으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녀였고, 왕비와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한 소문이 커지자 왕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스웨덴으로 돌아가 자진해서 미국 독립전쟁(1776년~1783년) 참여하게 된다.

 

1778년이 돼서야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잘생긴 외모와 친절한 매너로 그는 인기가 상당히 많았고 왕비와는 정신적인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암암리에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고 가던 중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왕비는 페르젠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게된다. 그는 바로 베르싸이 궁전으로 달려오지만 왕비의 측근들은 그리 좋은 시선으로 볼 수없었던 것이 늘 의문의 두 사람의 관계가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는 튈레리 공원 안 부속 감옥에 갇히게 되고 페르젠 백작은 적극적

으로 나서서 왕과 왕비의 도주를 계획했으며 전적으로 페르젠 백작의 호위 아래 1791년 6월 20일 몰래 마차를 타고 벨기에를 향해 도주를 실행하는데 파리 근교인 ''봉디''라는 곳에 잠깐 머무를때 루이 16세가 본인을 도우려다가 문제도

될 수 있고 간간히 들리는 왕비와의 관계로 더 이상의 호위를 거부하게 된다.

왕비와 페르젠 백작은 국경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헤어지게 되지만 결국 왕비의 향수 냄새로 바렌이라는 지역에서 붙잡혀 그들의 도주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렇게 감옥에 있는 와중에도 거의 1년 넘게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페르젠 백작은 왕과 왕비의 도주를 도우려 혁명단에 대항하는 유럽연합군을 형성하려 한다든지, 비엔나에 연락을 취해 도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노력도 해보지만 결국 다 거절당하자 본인의 무능력함에 좌절을 하게 되고, 때마침 이들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하듯 ''후작 바르나브가 여왕의 애인이다'' 라는 거짓 소문까지 나자 실망한 나머지 브뤼셀로 떠나 설리반이라는 여인을 잠깐 홧김에 사귀기도 했지만 결국 영원한 사랑 마리 앙투와네트를 구하고자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한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단두대로 처형이 되고 , 1793년 10월 16일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처형된다.

 

그녀가 남긴 페르젠과의 서신중에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편지를 끝낼 수가 없네요''

 

이듬해 마리 앙투와네트가 처형되자 페르젠은 자신의 누이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쓴 내용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했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의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뿐이다''

 

1793년 브뤼셀에서 왕비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르젠은 크게 슬퍼했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평생 왕비를 애도하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7년 후인 1810년, 6월 20일(바렌으로 마리 앙투와네트의 도주를 도와 목숨까지 걸었던 날) 그 또한 마리 앙투와네트 못지않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덴마크 뫙자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왕자가 죽자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왕자의 장례식에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무리하여 참석했다가 군중들에게 폭행당해 사망하게된다.

안타깝게도 페르젠 백작의 사망 후 몇 달 뒤에 누명은 벗겨졌고 페르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이미지출저: leMonde/ 주고 받은 서신

페르젠 ''당신을 사랑하고, 남은 내 인생 동안 당신을 미치게 사랑할 거예요''

왕비 ''당신은 내가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는 남자이며 내 마음은 모두 당신의 것이에요''

페르젠 '' 나는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에요''

왕비''신이시여,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를 볼 수 없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에요''

 

등등 이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페르젠 백작은 그녀가 처형당하기 전까지도 두 사람이 서로 2년 동안 56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중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냈던 글들은 거의 검은 잉크로 칠해졌고 서신 15통 중에 7통은 전혀 해독할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왕비의 안전을 위해 페르젠 백작이 읽고 나서 같은색 잉크로 철철히 지웠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더 해지고 있다.

 

왕비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의 동생에게 썼다는 페르젠의 편지.

 

오오 신이시여,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도 심한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렇게도 당신의 노여움을 사다니 대체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다는 것입니까?

아아.. 나의 변함없는 동생이여.

아아.. 나는 왜 그녀의 곁에서 죽지 못했을까?

그녀를 위해 그 6월 20일(본인의 목숨을 걸고 마리 앙투와네트의 도주를 도운날짜)에 죽는 편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나의 모든 것이던 그 사람은 이미 없구나.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나의 깊은 애정을 깨달았다.

그녀의 모습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떠나지 않고 항상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속해온 그들만의 플라토닉 사랑? 간음? 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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