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침 식사의 대명사인 크루와상 (Croiss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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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침 식사의 대명사인 크루와상 (Croissant)

by today paris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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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의 친숙한 아침식사 동반자이자 우리에게도 익숙한 크루아상은 해외에서 프랑스의 상징이지만 생각하는 것

처럼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여러 전설이 퍼져 나가면서 그 기원이 알려지게 된다고 하는데,,,,

제빵사 덕분에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약간 씩 달라져 현재의 명성을 얻고 해외적으로도 알려진 크루아상!

천천히 알아가 보자.

 

프랑스의 크루아상의 역사

 

13 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 조리법 (짠맛 또는 단맛)이라든가 반죽 방법은 따로 전해지진 않고, 중부 및 동유럽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북 마케도니아,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일종의 빵으로 kipferl 또는 kifli. (키펠 또는 키플리-초승달 모양) 형태에서 알 수 있듯이 크루아상의 원조라고 한다. 

 

프랑스에 건너오게 된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1549 년 파리에서 열린 궁전 파티에서 프랑스 여왕이 제안 한 "크루아상으로 만든 40 종류의 케이크"인데 그 당시 의도로는 당대 프랑수와 1 세왕과 터어키의 동맹을 기념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프랑스 국립 요리 예술 센터에 있는 프랑스 요리 유산 목록에 언급되고 있다.

 

또는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마리 앙투와네뜨 Marie-Antoinette가 시집을 오면서 혼수처럼 가져온 레시피로 1770 년부터 프랑스에서 크루아상을 공식적으로 소개하고 대중화하였다고 전해지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Vienne비엔나 에서 왔기 때문에 viennoiserie 비에누와즈리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viennoiserie 비에누와즈리 비엔나풍의 제과 또는 제빵

 

파리에서는 1837년~1839년사이에 오스트리아 제빵사인 August Zang과 Ernest Schwarzer가 동업으로 파리에 오픈한 (92 번지 rue de Richelieu ) 비엔나풍의 빵집에서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오늘날 크루아상에 가까운 빵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만의 버전이였던 kipferl 또는 kifli. (키펠 또는 키플리-초승달 모양)과 kaisersemmel (카이저 빵 또는 황제의 빵)은 빠르게 많은 제빵사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크루아상은 1850 년에 프랑스에서는 인기 있는 대중적인 빵으로 등급 하게 된다고

 

프랑스에서는 크루아상 이라는 용어가 1863 년 사전에 처음 등록되었다고 하며, 크루아상의 첫 번째 레시피는 1891 년에 출판되었지만 오늘날의 크루아상과는 좀 거리가 먼듯하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크루아상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레시피는 1905 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20 년대가 되어서야 viennoiserie 비에누와즈리 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크루아상은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먹는 또 다른 제과인 빵오 쇼콜라(pain au chocolat)와 같은 밀가루, 설탕, 버터, 효모 및 물로 된 혼합물을 반죽 한 다음 여러 층으로 포개어 크루아상 모양을 만들고 발효시킨 뒤 180 C에서 약 15 분 동안 굽게 되는 방식인데 오늘날에 우리가 먹고 있는 크루아상 레시피이다.

그러나 프랑스 요리 관련 역사가들은 현재 크루아상 레시피가 20 세기까지는 프랑스 요리의 상징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프랑스의 상징적인 다른 빵과 마찬가지로 크루아상의 관련한 다양한 직접적인 기원 또는 레시피는 구두로 전해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프랑스에서는 1950년에서야 본격적으로 프랑스 아침식사를 대표하는 빵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크루아상이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를 대표하게 된 이유는 1977년 두 명의 프랑스 인 Jena-Luc Bret와 Gérard Joulin이 동업으로 창립한 회사 La Croissanterie (라 크루아상트리)를 프랑스와 해외에 지사를 두고 개장함으로써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왜 초승달 모양일까?

 

전설적인 크루아상 모양이 초승달인 이유는 일단 결론적으로는 터어키 또는 이슬람의 상징이다.

초승달 모양에서 영감을 받은 크루아상의 원조는 적어도 1000년 이상을 자랑하는 전통적인 비엔나풍의 제과로 부활절 시즌에 주로 만든 빵이었다고도 한다. 크루아상의 등장 썰은 여러 가지로 전해지는데

 

크루아상이 초승달 모양인 것은 1683 년 터어키 오스만 제국이 비엔나를 포위하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마을 성벽 밑 땅에 터널을 파기 시작했는데,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난 제빵사 아담 스필(Adam Spiel)이 그들을 격퇴할 수 있도록 주민과 군인들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 터어키 오스만 군대에 대항하여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군대가 승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빵사들은 터어키 국기에 나타나는 상징을 연상시키는 모양을 가진 과자 Hörnchen (독어 명칭-작은 뿔)를 만드는 특권을 가지게 되면서 초승달 모양의 크루아상이 등장하게 된다고 하는데 똑같은 버전이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1686 년 부다페스트를 터어키 오스만 군대가 포위하는 동안 부다페스트 제빵사가 미리 알려줘서 부다페스트가 승리했다라고도 전해진다.

 

오스트리아 비엔나풍의 제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당시 터어키와의 전쟁에서 수백 명의 군인과 장교가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군인들은 참여한 용기와 고생의 대가로 전투 후 일종의 선물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중 한 군인 인 Jerzy Franciszek Kulczyck는 스파이이자 외교관이며, 폴란드 상인으로 비엔나에 최초의 카페인(커피) Zur blauen Flasche ( À la Bouteille Bleue : 파란 병?이라 불리는)의 소유자였다.

 

그 당시 유럽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검은 곡물 300 자루를 전투 포상으로 얻게 되는데, 이는 터키인들이 도망가면서 버려둔 바로 커피였던 것이다. 그는 커피 원두를 빻아 비엔나 사람들에게 제안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고민을 하게 되고 궁리 끝에 커피를 빵과 함께 판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어 도시의 한 빵집에 커피를 홍보할 수 있는 빵을 주문하게 되는데 터어키의 침략으로 인해 여전히 남아있는 전쟁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면서 터어키의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기로 결정, 그게 또 다른 오늘날의 크루아상에 관련된 전설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좋아하는 크루아상은 시간과 노력 대비 제품의 낮은 수익성 및 노동력 부족으로 일부 제빵사와 호텔에서는 버터를 마가린으로 대체하거나 냉동 반죽 제품으로 크루아상을 만든다고 하며, 크로아상을 오븐에 넣기 전에 해동하고 오븐의 열로 부풀게 하는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빵집에서 구입 한 크루아상의 80 % 이상이 이제는 냉동 제품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아상은 바게트 못지않은 프랑스 대표적인 상징 빵으로, 심지어 본고장인 오스트리아에서도 요즘엔 이 빵을 크루아상이라 주로 부르고, 가끔 Hörnchen (작은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상 속 아침 출근길, 진한 엑스프레소와 함께 고소한 버터(?) 냄새가 코를 찌르는 따끈따끈한 크루아상은 일터로 향한 파리지앙들의 활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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