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LOOK''의 창시자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단 10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으로 패션 역사에서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우아함이란 구별과 자연스러움, 돌봄, 단순성 등
이 네 가지의 바른 조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면 가식만이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돌봄이다.
돌본다는 것은 당신이 옷을 고르고,
고른 옷을 입고, 그 옷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05 년 북프랑스 노르망디의 그랑빌에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상무부 장관인 루시앙 디오르 친척을 비롯 , 비료와 표백제를 전문으로 하는 부유한 기업가 모리스 디오르와 우아하고 정원 가꾸는 열정을 가진 마들렌느 디오르 사이에서 다섯 자녀중 둘째로 태어난다.
1920 년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파리 정치과학 연구대학에 입학하지만 그의 회고록에 고백하는 것처럼 건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정치 학부에 등록은 하지만 결국 1926 년 졸업장없이 그만두게 된다.
1929년 국가적 경제 위기가 닥 치차 그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어린 추억이 담긴 그랑빌 집을 팔수 밖에 없던 처지에 이르고 , 1931 년에는 그의 예술 감각에 깊은 영향을 끼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그에게 있어서는 1930 년대는 최악의 시기였다.
경매로 넘어가 매각이 된 그랑빌 집은 지금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박물관이 되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
그가 패션과 처음으로 연을 맺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의 친구이자 배우였던 졍 오젠느가 생활 방편으로 그린 드레스와 모자 크로키를 보고 그의 재능이 아까워 스케치 그림을 판매하도록 권장 , 1935 년에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클로드 생시르 , 밀린 마담 아그 네스에게 드레스와 모자의 첫 스케치를 팔게 되면 서다.
그 후 피가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고용되어 일하다가 , 1938 년 드디어 당시 유명한 디자이너 로버트 피게에 의해
모델 제작자이자 디자이너로 고용되므로 패션계에 발을 딛는다.
그렇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전쟁에 참여한 그는 1941년이 되어서야 겨우 파리로 돌아오고 그 이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파리에서 가장 큰 디자인 회사 중 하나인 루시앙 르롱에 합류하게 된다.
갤러리스트인 크리스티앙 디오르
그는 다양한 예술분야에 관심이 상당이 많았었는데 음악분야는 물론 특히 크로키나 회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1928년 부터 1934년까지 갤러리를 운영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른 1928년 친구 쟈크 봉장과 함께 첫 아트 갤러리를 열었고.1931년에는 친구 피에를 콜과 함께 또 다른 갤러리를 열게 된다.
1933 년에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마르셀 뒤썅,르네 마그리트,알베르토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만 레이, 조안미로 ,장 아르프와 같은 권위 있는 예술가와 시인의 작품을 모은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프랑스에서 가장 최초로 열게 되는데 그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1945년에 드디어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재능을 알아본 ''코튼의 왕''이라고 불리는 섬유회사의 거장 마르셀 부싹크를 만나 후원의 제의를 받게 되는데 미신을 좋아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점술사를 찾아가서 점을 보게 된다고,,,
''무조건 수락하고 받아들여서 당신의 이름을 살린 하우스를 만들어야 한다,이 기회로 인해 나중에 누릴 수 있는 모든 행운이 당신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마르셀 부싺크는 6천만 프랑을 투자하여 1945년 파리의 가장 유명한 거리인 몽테뉴 30번지에 그의 패션 브랜드 매장을 낼수 있도록 지원하고 1949년12월 16일 개장하면서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예상대로 1947년 2월12일 그의 첫 컬렉션인 '' newlook"을 선보이면서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패션계를 뒤집어 놓게 되는데 허리를 강조하며 여성스러운 좁은 어깨 라인과 둥근 가슴을 받쳐 올리고, 살짝 무릎 밑으로 내린 긴 플레어스커트가 주는 실루엣은 혁신적이었다.
''우리는 전쟁기에서 벗어나고 있고 제복과 군인 같은 여성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 new look
크리스타앙 디오르의 다음 컬렉션은 첫 컬렉션만큼이나 놀라운데 1954년 ''그린빈''이라는 별명을 붙인 ''H 라인''과 앵글로 색슨 언론의 ''플랫 룩''에서는 이전의 컬렉션 이미지를 완전히 깨게 된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스타일에서는 크게 3가지 주요시대를 구별할 수 있는데,1974년 첫 패션쇼를 통해 여성미를 강조한 뉴룩, 2번째는 1950~1953년 까지 허리와 엉덩이가 덜 두드러지는 덜 풍만한 곡선 라인, 마지막은 1920 년대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미학적으로 허리 곡선이 눈에 띄게 없어져버린 1954년에 발표한 H 라인이 해당된다.
패션 디자이너로써의 크리스티앙 디오르
이렇듯 튤립 라인, H 라인, A 라인, Y 라인 등을 발표하면서 컬렉션의 새로운 라인과 각각의 새로운 컨셉은 패션계에서 매우 기대되는 이벤트 였다.
또 어린 시절 친구의 조언에 다라 1947년에 그는 브랜드 매장과 동시에 향수 회사를 동시에 론칭하고,그의 첫 번째 향수가 ''Miss Dior''로 2차 세계대전시 레지스탕스였던 그의 여동생 카트린느 디오르를 기리기 위한 뜻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에게 향수는 ''여성의 개성미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필수품이자 옷매무새의 마지막 터치이다''
그는 1948년 패션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으로 더나 크리스티앙 디오르 뉴욕지사를 열었으며 11년 만에 그의 활약은 15개국으로 확대되어 2천명 이상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1957년에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프랑스 디자이너 옷의 절반이상이 바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컬렉션이었기에 그해 타임 매거진의 첫 표지는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도배가 되었다.
1957년 10월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그의 조수 이브 생 로랑과 함께 디자인 한 fuseau 방추형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선보인다.
52세에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온천지에서 치료를 받으며 휴가를 보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고 현재 그의 무덤은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 마을에 안치되었다.
52세라는 젊은 나이로 패션계의 별은 사라졌으나 그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이브 생 로랑이 발표한 트라페즈 라인을 시작점으로 파리 오뜨 꾸튀르의 주역이 되었고,이브 생 로랑을 비롯하여 마르크 보앙, 지안 프랑코 페레,존 갈리아노등 스타 디자이너들이 그를 이었다.
패션계의 로맨티시스트라고 불리던 크리스티앙 디오르 시대적인 감각을 탁월하게 표출해낸 천재적인 ;디자이너로써
''꽃 같은 여성을 디자인 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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