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10 가지 흥미로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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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10 가지 흥미로운 사실

by today paris 2021.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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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며 평생을 보냈다"로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는 탁월한 화가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계에서도 기록적인 기록을 보유한 그는 살아생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숭배받아 왔다.

조지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 운동의 창작자였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시대를 넘나들고 다양한 스타일로 작업을 했다.

대부분의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파블로 피카소의 삶 또한 그의 예술을 능가하는 일화와 사실로도 유명하다.

 

 

 

 

피카소의 너무나도 긴 실명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피카소''는 전 세계에 "피카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실명은 가명보다 훨씬 길고 더 복잡하다.

놀랍게도 그 이름은 실제로 23개 이상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피카소의 정식 이름은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Martyr Patricio Clito Ruíz y Picasso이다. 그는 가명을 선택하기 위해 실제로 그의 어머니의 처녀 이름인 ''피카소''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하게 된다.

''피카소''라는 이름은 이국적이었고 특히 이 이름에 대해 그가 끌렸던 이유는 "s"로 주어진 자음인데 스페인에서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에서 온 이름이었고 피카소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을 선택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오랫동안 역사에 남는 이름이 되었다.

 

운명을 정해 준 첫 마디.

 

보통 태어나서 말을 시작할 때 "아빠", "엄마"라는 단어로 부모님을 연상시키는 첫마디를 단어를 기대하지만, 피카소는 어릴 때부터 이러한 일반적인 단어보다 그림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피카소의 어머니에 따르면, 피카소가 아기였을 때 처음으로 말한 단어는 "Piz"였는데, 이것은 ''연필'' 뜻하는 스페인어 단어로 "lápiz"의 줄임말이다. 이로 인해 그의 가족들은 피카소를 끼를 알아보고 어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받게 된다.

 

최초의 작품이 ... 7살 때

 

 

그는 9살 때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Le Petit Picador Jaune/ 작고 노란 투우사"를 그렸는데, 평생 동안 이 작품을 그에 곁에 끼고 살았다고 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13세에 바르셀로나에서도 권위가 높은 미술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1년 동안 준비해야 하는 입학 기준이 있었지만 피카소는 단 1주일 만에 입학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이미 깨달은 피카소의 아버지가 그에게 7살부터 그림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실력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한 그의 아버지.

바르셀로나의 미술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피카소 아버지는 피카소 뛰어난 재능에 더 이상 아들에게 가르칠게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한다. 벌써 13세의 피카소는 아버지가 시작한 비둘기 스케치를 단숨에 완성해 버린다든지... 피카소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아들의 타고난 예술성과 명성으로 자신이 많은걸 포기해야 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피카소의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 부자간의 불편한 관계의 이유였다.

 

다재다능했던 피카소

피카소는 화가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조각가, 도예가, 시인, 극작가 및 무대 설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는 1 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의 회사 소속이었던 ''러시아 발레단''과 협력하여 그곳에서 입체적인 무대 세트와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발레리나인 첫 부인 올가 고콜 로바 (Olga Khokhlova)를 만나게 된다.

 

또한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35 년 첫 결혼생활이 마칠때쯤 나타나게 되는데 1935 년에서 1959년 사이에 피카소는 300 편 이상의 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40 년대에 그는 초현실주의 연극 극본으로 ''꼬리에 잡힌 욕망''과 ''나의 어린 소녀''라는 작품을 직접 쓰기도 했다.

 

유명한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 피카소

 

"좋은 예술가는 복사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라는 말을 한 탓에 1911년 유명한 모나리자가 도난을 당하게 되자  흥미롭게도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아폴리네르와 피카소가 용의자로 오르게 된다.

사실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피카소가 밀거래로 산 이집트 동상 2개가 루브르에서 없어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나서 2년이 지난 후 결국 이 모나리자를 훔친 사람은 애국심이 강한 이탈리아 사람으로 모나리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훔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작품만큼은 뺏어온 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수와 1세에게 선물로 가져온 작품이다.

 

 "콜라주"기법을 탄생시킨 피카소

 

 

조지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를 연구하는 동안 피카소는 신문지나 벽지 등을 그의 작품에 삽입하는 현대 콜라주 기법을

처음으로 발명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창의력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미술 세계에 도입되면서 다시 한번 피카소가 그 세대에서 가장 아방가르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다작의 화가로 간주되는 피카소

75 년 이상의 회화 경력과 끊임없는 창조력으로 피카소는 완전한 자유를 창조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피카소의 재능과 그의 작품의 수익성을 잘 알고 있는 기네스북에 의하면 그의 회화와 드로잉은 13,500 점, 판화는 100,000 점, 책 삽화는 34,000 점, 조각과 도자기 제작은 300 점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도난 당한 화가 

피카소의 중요한 작품과 그 엄청난 가치를 감안할 때 피카소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하고, 대체하고, 복사되는 건 어쩜 거의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2012 년 미술 손실 기록에 따르면 피카소의 작품 1,147 점을 도난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유명한 사례로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작가의 작품 4 점이 한꺼번에 도난을 당하게되는데 페르낭 레거, 앙리 마티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리고 조지 브라크 가장 대표적인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던 도난 건이었다. 뒤에 잡힌 가해자는 이 작품들을 매립지에 폐기했다고 주장하였지만 8 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여성편력이 강했던 피카소

피카소는 일생 동안 정말 복잡한 여성 관계로 두 번 결혼과 세 명의 여성과는 사실혼으로 자녀를 두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올가는 17 세의 젊은 여인인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 발전으로 1935 년에 와 피카소와 헤어져야 했지만 피카소가

자신의 재산 공유를 거부하자 그녀는 1955년 사망할 때까지 그와 혼인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피카소의 젊은 여성에 대한 취향은 일반 대중에게도 너무나 유명한데 특히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프랑스와 질로와는 두 자녀가 있으며 그녀는 10 년 동안 그의 뮤즈로 남았지만 결국 피카소를 떠나게 된다.

훗날 ‘’피카소와의 일상’’이라는 자서전에서 피카소와의 격동적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공식적인 법적으로 2번째 부인인 재클린 로케는 프랑수아 질로의 아이들이 피카소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화가였던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 로크와의 관계로 인해 지나간 피카소의 뮤즈들에게 늘 불안해하고 아주 민감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7명의 그의 뮤즈들은 다음 편에 포스팅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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